고대 아라비아 문헌 속 신라, 섬으로 착각된 동쪽 끝의 이상향

신라에 남은 페르시아의 흔적을 처음 보았을 때

경주 황남동 유적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유리잔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색감이 도자기와는 전혀 다른, 깊고 맑은 청색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였다. 5세기, 아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시기였다. 이 유물이 경주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택배로 온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 직접 들고 왔고,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말보다 확실한 증거가 바로 유물이었다.

페르시아가 유리로 아름다움을 만들었다면, 중국은 도자기로 승부했다. 신라는 그 두 문명의 길목에 서 있었다. 직접 만들기보다는 수입을 통해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 교류의 무게가 지금도 땅 속에서 빛나고 있다.

 

신라의 무인석, 그 얼굴이 낯설었던 이유

경주 원성왕릉 앞에 서 있는 무인석을 보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눈매와 코선이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이 아니다. 서역인, 즉 당시 페르시아나 그 후속 왕조 사람들의 특징을 닮아 있다. 신라인이 상상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 시대, 실제로 그런 인물을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의 손길 같았다.

그렇다면 신라에 페르시아인이 직접 들어왔다는 말일까. 학자들은 신중하지만, 적어도 신라인이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아라비아인들이 본 신라의 모습

한쪽에서는 유물이 남았고, 다른 쪽에서는 기록이 남았다.
8세기 아라비아의 우편 배달부 쿠루다드비는 여행 안내서를 쓰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중국의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많이 나고, 이슬람 교도들이 그곳에 가면 떠나려 하지 않는다.”

한 무역상은 신라를 “섬나라”라고 기록했다. 그들에게 동쪽 끝의 땅은 실체보다 상상에 가까웠다.
“그곳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하늘이 비를 주려면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야 한다고 믿는다.”
정확하지 않지만 묘하게 생생하다. 마치 먼 나라에 대한 오랜 소문처럼.

그리고 13세기의 한 학자는 이렇게 썼다.
“신라는 매우 유쾌한 나라이다.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하며, 병을 볼 수 없다.”
그가 실제로 신라를 본 건 아니었겠지만, 그 글에는 이상한 따뜻함이 남아 있다.

 

상상 속의 나라, 그러나 닿아 있었던 현실

아라비아에서 본 신라는 이상향이었고, 신라에서 본 페르시아는 신비한 서역이었다.
둘은 서로의 실체를 완전히 알지 못했지만, 교류는 분명 존재했다. 경주에서 나온 페르시아 유리잔, 서역인의 얼굴을 닮은 무인석, 그리고 아랍 문헌 속의 신라.
이 셋이 서로를 증명한다.

대전의 한 연구자는 “통일신라 시대에는 직접적인 인적 교류가 있었다”고 정리했다. 다만 그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은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물건은 오갔지만, 사람의 발걸음은 아직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남은 것은 기록과 상상, 그리고 질문 하나

결국 서로의 기록이 이렇게 남았다.
신라인은 페르시아의 유리를, 아라비아인은 신라인의 웃음을.
시간이 흘러도 이런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혹시 그때의 누군가가, 먼 사막 끝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신라를 떠올렸을까.
금빛 나라, 웃음 많은 사람들,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
그 상상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게 참 묘하다.

돌아보면 결국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우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렇게 남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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