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영안까지, 발해 수도 상경성 유적을 찾아간 여정

시작하며

며칠간의 일정으로 중국 하얼빈과 목단강, 그리고 영안시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이다. 이곳은 발해의 중심이자 동북아 고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하지만 현지 박물관을 둘러보며 느낀 건 단순한 유적 감상이 아니었다. 중국이 발해 역사를 ‘자국사’로 재해석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1. 하얼빈에서 영안까지, 발해의 중심으로 가다

하얼빈에서 영안시까지는 약 5시간 거리다. 예전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최근엔 고속도로가 잘 뚫려 이동이 한결 수월해졌다.

이 지역은 흥룡강성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이의 외진 곳으로, 고대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북방의 땅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발해라는 나라가 수도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1) 왜 발해는 이곳에 수도를 세웠을까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후계 국가가 아니라, 북방의 다양한 세력을 통합한 복합적 왕국이었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말갈계 주민들도 살고 있었고, 그들이 함께 문화를 만들어 갔다.

① 북방 지역 첫 국가로서의 의미

  • 고구려 멸망 이후, 이 지역에는 독자적 국가가 없었다.
  • 발해는 동북아시아 북부 지역 최초의 ‘국가 체계’를 세운 존재였다.
  • 세계사적으로도 고립된 변방이 아닌, 새로운 문명권의 형성이었다.

② 교통·지리적 장점

  • 송화강과 흑룡강을 잇는 교통 요충지에 자리했다.
  • 북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남쪽으로는 길림성 일대까지 연결됐다.
  • 발해의 해상 교역로와도 맞닿아 있었다.

이런 조건 덕분에 발해는 고구려의 정신을 잇고, 당나라·일본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2. 상경성 박물관, 그 안에서 본 발해의 흔적

영안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발해 상경성 유적지와 박물관이다. 새로 단장된 건물로, 겉보기엔 현대적이지만 내부 전시의 내용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1) 박물관 전시의 구조와 흐름

입구부터 ‘당나라의 영향 아래 발해가 발전했다’는 문구가 곳곳에 등장한다. 전시관의 섹션도 ‘당과의 교류’, ‘조공 관계’, ‘당풍 건축’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① 전시의 주요 흐름

  • 초기 발해의 건국: “당나라의 책봉으로 시작된 지방정권”
  • 경제와 문화: “당의 제도를 본받고, 조공으로 번성했다”
  • 멸망: “당과의 관계 약화로 쇠퇴”

② 현지 전시의 문제점

  • 고구려의 흔적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 ‘발해=당의 속국’이라는 구도를 전시 전반에 심어 놓았다.
  • 심지어 발해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빠져 있다.

 

(2) 박물관에 남은 유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은 여전히 발해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은 기와, 토기, 불상, 그리고 벽화다.

① 기와와 건축 양식

  • 고구려의 와당 문양을 이어받은 심장형 기와가 다수 발견된다.
  • 건축 양식 역시 장안성을 모방했다기보단, 북방의 기후와 지형에 맞게 변형된 형태였다.

② 토기와 도자기

  • 물레로 정교하게 빚은 항아리는 고구려-발해 문화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 손으로 빚은 거친 그릇은 ‘말갈계’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발해의 일반 서민 문화였다.

③ 불상과 종교 유물

  • 고구려 불상 양식을 계승한 석불이 다수 존재한다.
  • 연해주 쪽 유적에서는 경교(景敎, 초기 기독교)의 십자가 문양이 함께 발견되어, 다양한 종교 문화의 융합을 보여준다.

 

(3) 실제 전시 설명의 문제

가장 불편했던 점은, 발해의 문자가 있었음에도 전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릇에 새겨진 독자적 문자 흔적이 있고, 일본 사서에서도 “발해인이 스스로 만든 글자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박물관에서는 “발해는 한자만 사용했다”는 설명만 남았다. 이는 중국이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부’로 규정하기 위한 전형적 전시 방식이다.

 

3. 중국식 해석으로 바뀐 발해사

발해사 전시의 핵심 문장은 대부분 ‘조공’, ‘책봉’, ‘당의 문명’이었다. 중국은 최근 발해를 완전히 ‘중국사 내부의 지방정권’으로 재편하고 있다.

 

(1) ‘조공=중국 땅’이라는 논리

중국 측 전시는 “당에 조공을 바친 지역은 모두 중국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전제로 한다. 이는 무역 관계를 정치적 복속 관계로 왜곡한 해석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과거 일본이나 베트남까지도 모두 ‘중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

 

(2)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규정하는 시도

최근 중국 교과서에서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서술한다. 즉, 고구려의 계승성을 삭제하고 ‘오랑캐 말갈’의 국가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발해를 분리하여 한국과의 역사적 연결을 끊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3) 그 배경에 깔린 현실적 목적

1960년대 이후, 중국은 만주 지역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백두산-장백문화론’을 내세워왔다. 이는 단순한 역사 논쟁을 넘어, 한반도 북부 영토와 문화권까지 중국사로 포섭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4. 발해 유적의 현장, 그리고 남은 과제

발해 상경성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 이곳에는 수백 년간 왕들이 살았던 궁궐터가 있고, 화려한 벽화와 불상이 출토됐다. 그러나 지금 현장 보존 상태는 완벽하지 않다. 일부 무덤은 훼손되고, 방치된 흔적도 보였다.

 

(1) 발해인의 문화적 수준

발해는 추운 지역에서도 고급 도자기, 불교 예술, 문자를 발전시켰다. 이는 단순히 당 문화를 흉내 낸 게 아니라 자체 기술력과 미적 감각을 지닌 고유 문명이었다.

 

(2) 유물의 국제 분산

현재 발해 관련 유물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

  • 중국 영안·길림성 지역
  • 북한
  • 일본(도리야마의 도굴품 일부)
  • 한국(서울대학교 소장품)
  • 러시아 극동 지역

이는 발해 연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일중러 4국이 모두 관련된 역사임을 말해준다.

 

5. 마치며

박물관을 둘러보며 가장 크게 느낀 건, 발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지키려면 지금 우리가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발해는 당의 속국이 아니었고,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명을 세운 주체적 국가였다.

역사는 정치가 아니라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 이 지역에서는 기록이 다시 쓰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말하지만, 그 흔적 속에서 나는 고구려의 숨결과 북방인의 자존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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