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과 페르시아가 만난 역사
우리가 잊고 있던 ‘이란’과의 오래된 인연
1970년대 후반, 한국 뉴스에 ‘이란’이 거의 매일 등장하던 시기가 있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팔라비 국왕이 쫓겨났고, 세상이 크게 요동쳤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와 이란은 꽤 가까운 관계였다. 둘 다 친미 성향이었고, 실제로 서울과 테헤란은 ‘자매 도시’였다.
그래서 강남의 중심 도로 이름이 ‘테헤란로’가 된 것이다.
이란 테헤란에도 ‘서울로’라는 이름의 거리가 생겼다고 하니, 그 시절의 상징적인 교류였다.
하지만 혁명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양국의 관계는 조금 멀어졌다. 그래도 도로 이름만큼은 그대로 남아, 그 시절의 흔적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가끔 그 도로를 지날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라 사이의 관계도 결국 사람 관계처럼, 굳이 등 돌릴 이유가 없다는 걸.
옛 문헌에 기록된 ‘파사국’이라는 이름
이란, 즉 페르시아는 중국 고대 사서에도 자주 등장했다.
물론 ‘페르시아’라는 음을 그대로 한자로 쓸 수는 없어서 ‘파사(波斯)’ 혹은 ‘파사국(波斯國)’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이 파사국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한국인’의 손에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해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는 인도를 비롯해 서역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그 기록 중에는 ‘파사국’과 ‘대식국’이 함께 등장한다.
이 기록은 8세기 초의 일로, 이미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651년)한 뒤였다.
해초는 “파사국이 멸망하고 그 자리를 대식국이 차지했다”고 남겼다.
즉, 페르시아의 자리에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세력을 ‘대식국’이라 부른 것이다.
대식국은 누구였을까
‘대식(大食)’이라는 한자만 보면 밥을 많이 먹는 나라 같지만, 실제 뜻은 전혀 다르다.
이는 아랍어 ‘타직(Tajik)’을 음차한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나 아바스 왕조 같은 초기 이슬람 왕조들을 ‘대식국’으로 표기했다.
결국 ‘파사국’이 페르시아라면, ‘대식국’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이었다는 말이다.
그 시점부터 아라비아 반도와 중앙아시아의 역사적 무대는 완전히 바뀐다.
이슬람이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며 거대한 문명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기록 속에도 등장한 ‘대식국’
놀랍게도, 우리나라 역사서에도 대식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려사》에는 세 차례나 등장한다.
1024년, 1025년, 그리고 1040년.
세 번 모두 ‘대식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무려 100명 단위의 상인단이 연이어 왔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의 해상 교역이었다는 뜻이다.
그 시절의 고려는 분명 바다를 통해 서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낙타 행렬이 아닌 거대한 배를 타고, 먼 서남아시아에서 온 상인들이 개경(지금의 개성) 근처까지 왔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교역의 폭을 짐작하게 한다.
기록이 세 번뿐인 건, 아마 실제로 세 번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주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물’이 남긴 여운
기록뿐 아니라, 실물도 남아 있다.
경주 황남동에서 발견된 금제 보검 자루.
보석으로 장식된 이 유물은 신라가 만든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한 점의 유물이 말해주는 건 단순한 교역의 흔적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신라와 페르시아가 바다를 통해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테헤란로’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된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남기고 있는 기록들, 그중 일부는 수백 년 뒤 누군가의 지도 위에서 또 다른 ‘좌표’가 되지 않을까.
지금 다시 묻게 된다, ‘이슬람 왕국의 좌표’는 어디였을까
역사학자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파사국과 대식국, 즉 페르시아와 이슬람 제국의 경계가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한 문헌에서는 같은 곳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했고, 또 다른 시대에는 그 경계가 바다를 넘어섰다.
결국 ‘이슬람 왕국의 실제 좌표’는 고정된 지점이 아니라, 문화와 교류의 흐름 속에 있었다.
이란의 혁명도, 고려의 기록도, 경주의 유물도 모두 그 흐름의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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