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끝에 북경에 닿은 조선 사람들, 그들을 바라본 사대부의 눈
조선의 바다는 종종 사람을 삼켰다. 1801년, 흑산도의 어부 네 명이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바다를 떠돌다 오키나와에 닿았고, 거기서 또다시 폭풍을 만나 필리핀으로 밀려갔다. 생사를 오가던 그들은 현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 도착했고, 북경까지 걸쳐 조선 사신단을 기다리다 마침내 귀국길에 올랐다. 4년 가까운 여정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 한 페이지의 기록으로 남았다. 바로 1804년 사절단의 기록서 ‘계산기정’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찬탄하기보다, “무식해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는 말 한 줄로 끝난다. 그 짧은 구절이 당시 조선 사대부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조선 사대부의 눈에 비친 ‘무식한 백성’
‘계산기정’의 저자는 표류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썼다.
“그들은 천하를 구경했지만 무식하여 기록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여기서 ‘무식’은 단순히 글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학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적 수준이 낮다고 본 것이다.
그의 시 속에는 더 노골적인 편견이 드러난다. “흑산도의 백성은 어리석어 바다에서 이익을 좇으니 가난하다.”
즉, 농사를 짓지 않고 어업이나 상업을 하는 건 어리석음의 증거라는 말이다. 19세기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상업은 이미 활발해지고 있었지만, 유학적 가치관에 갇힌 지식인에게는 여전히 ‘도덕적으로 낮은 행위’로 취급됐다.
이 시각은 단순한 오만을 넘어 사회 구조를 결정짓는 인식이었다. 농업 중심의 질서를 지키려는 사대부의 세계관은 새로운 변화, 특히 실용적 지식이나 상업적 감각을 철저히 배제했다. 표류민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단지 ‘흥미로운 일화’일 뿐, 배울 만한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정약전이 보여준 다른 길
하지만 같은 시대에 정약전은 달랐다.
그 역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1801년, 표류민 중 한 사람인 문순득을 만난다.
정약전은 그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A4 용지 34페이지 분량, ‘계산기정’보다 50배는 길었다.
그는 문순득에게 “무식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겪은 바다와 외국의 풍경을 세밀히 기록했다. 흑산도의 외딴섬에서, 학문적 우월감이 아니라 인간적 호기심으로 타인의 경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정약전의 기록에는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세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려는 태도다. 당시로선 드물게 실용과 관찰을 중시한 시각이었다. 그 차이가, 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른 결말로 남겼다.
조선의 ‘지식 사회’가 놓친 것들
생각해보면 계산기정의 저자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그가 표류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면, 조선 최초의 해외 견문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식한 백성의 이야기’로 치부했고, 결국 한 장짜리 기록만 남겼다.
이건 단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조건의 문제이기도 했다.
출판 시장이 작고, 상업적 교류가 미약했던 조선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돈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학문이 곧 권력이던 사회에서 실용적 지식은 늘 주변에 머물렀다.
만약 그때 문순득 같은 사람의 경험이 더 널리 기록되고, 더 많은 이가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조선의 근대화는 조금 더 일찍, 조금 덜 고통스럽게 왔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는 건 태도의 차이였다
한쪽은 바다를 건너 생존을 걸었고, 다른 한쪽은 책상 위에서 그들의 무식을 탓했다.
조선의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열린 태도의 부족이었다.
정약전이 남긴 34페이지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결국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무언가를 모른다고 해서 무시하는가, 아니면 거기서 배우려 하는가.
표류민과 사대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받는다.
돌아보면, 그게 전부였다.
배운다는 건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라는 걸.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