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피로 태어나 죽음으로 끝난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비극
조선이라는 시대를 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이 복잡해진다. 신분이 곧 운명이던 그 세상에서 왕의 피를 타고난다는 건 부러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무거운 족쇄였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 천주교 성지를 찾았던 어느 겨울 오후, 그 생각이 다시금 뼈에 사무쳤다. 차가운 한강 바람 사이로 오래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철종의 할아버지였던 은언군 이인의 묘비였다.
묘비가 무덤에 있어야 할 텐데, 절두산 한쪽 벽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봉분도, 석물도, 제사 흔적도 없는 그 비석은 마치 제자리를 잃은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이곳은 19세기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절두산이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던 은언군의 비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 물음 하나가 나를 그의 생애로 이끌었다.
사도세자의 서자로 태어난 은언군의 불운한 시작
사도세자가 국녀 임씨에게서 낳은 아들, 은언군은 태어날 때부터 서자였다. 이미 정실 해경궁 홍씨에게서 정조가 태어나 있었기에 그의 존재는 조용히 덮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그 불화 속에서 은언군의 탄생은 축복보다는 부담에 가까웠다. 왕실의 눈에는 ‘사도세자의 또 다른 그림자’로 비쳤을 것이다.
뒤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은언군은 겨우 아홉 살이었다. 어린 형 정조가 아버지를 살려 달라며 울부짖던 그 순간, 은언군은 그저 조용히 숨어 있어야 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생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했다. 영조는 정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그를 다른 혈통으로 입적시키며 정통성을 세웠지만, 서자들은 그렇게 보호받지 못했다.
정조의 보호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던 왕족의 운명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은언군에게도 잠시 햇살이 비쳤다. 유배지에서 풀려나고, 궁으로 들어와 형의 곁을 지킬 기회도 생겼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은 그를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정조의 측근 홍국영이 자신의 여동생 원빈 홍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입양시켰다. 훗날 왕위 계승을 노린 계산이었지만, 결국 그 욕망이 모두의 파멸을 불러왔다.
상계군은 열여덟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자살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정조의 눈 밖에 난 세력들이 개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일로 은언군은 역적의 아버지로 몰렸고, 강화도로 유배됐다. 정조는 끝까지 그를 감쌌다. 몰래 은언군을 찾아가기도 했고,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형 명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 보호는 정조의 생명만큼 짧았다.
정조의 죽음 이후, 천주교 박해 속에 사라진 이름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다시 냉혹한 정치의 계절로 들어섰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며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죽어갔고,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역시 그 희생자였다. 두 사람은 신앙의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 그 후 은언군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신앙의 증거가 없었지만, 그는 결국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서자로 태어나 유배와 의심 속에 살다, 아무런 죄명 없이 생을 마감한 나이 마흔여덟.
그의 무덤은 지금의 서울 은평구 이말산 자락에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유실되며 흔적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흩어진 석물들뿐이었다. 어느 날, 후손들이 절두산 천주교 성지에 묘비를 기증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 마리아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비석은 왕의 후손이 아닌 순교자의 가족으로 남았다.
이말산과 절두산이 남긴 조용한 경계
며칠 전, 은평한옥박물관 마당 한켠에 서 있는 ‘금표비’를 봤다. ‘은언군지묘(恩彦君之墓)’라 새겨진 그 돌은, 조선 왕족의 묘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그 문구가 이상하게 아프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권위를 지키는 표식이 아니라, 더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을 지켜주는 외로운 경계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역사는 무색해진다. 사도세자의 죽음도, 정조의 개혁도, 그리고 은언군의 억울함도 어느새 교과서의 몇 줄로만 남았다. 하지만 절두산에 덩그러니 서 있는 그 묘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왕가의 피’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굴레였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왕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서자라는 이름으로, 역적의 아비로, 천주교 신자의 남편으로 살다, 결국 한강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비석 하나로 남았다. 누구보다 뜨거운 피를 가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냉정했다.
절두산의 찬 바람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그 비석 앞을 떠나지 못했다. 왕의 피로 태어나 인간의 고통을 다 겪은 사내, 은언군.
그에게 왕가의 혈통은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아직도 답을 내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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