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조선 초 혼인과 관직 기록
시작하며
“왕씨는 다 죽었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섰으니, 왕조 교체 과정에서 전 왕실이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나 역시 40대가 되기 전까지는 막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료를 하나씩 들춰보면 이야기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기록을 기준으로 차분히 정리해보면, ‘몰살’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오늘은 고려 왕씨 멸문설이 왜 반복되는지, 그리고 실제 기록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1. 왕씨가 정말 사라졌다면 지금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왕씨가 모두 사라졌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확인되는 통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족보와 인구 통계를 관심 있게 보기 시작한 건 부동산 중개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동네마다 성씨 분포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보면, 왕씨는 약 2만5,000명 수준으로 집계되어 있다. 수백만 명 단위는 아니지만, ‘멸종’이라는 표현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1) 조선시대 과거 기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왕씨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면 과거 급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과, 무과, 생원·진사시 등에서 왕씨 합격자가 확인된다.
①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이름을 올린 사례
- 문과 급제자: 소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 생원·진사시 합격자: 수십 명 단위로 기록이 남아 있다.
- 무과 및 기타 시험: 기술직과 무관직에서도 왕씨가 확인된다.
이 말은 곧, 왕씨가 완전히 사회적으로 봉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② 조선 초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더 현실적이다
- 왕조 교체 직후 긴장 국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 일부 지역에서 처형 사건이 있었던 것도 기록에 나온다.
- 그러나 수천, 수만 단위의 조직적 학살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전면 몰살’이라는 이미지는 후대의 상상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2. 성을 바꿔 살아남았다는 주장, 어디까지 사실일까
왕씨가 살아남은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 이야기가 있다. 성을 바꿨다는 설이다. 왕(王)에 점을 찍어 옥(玉)으로, 지붕을 더해 전(全)으로, 획을 추가해 다른 성으로 바꾸었다는 식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젊은 시절에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면서 한자의 변형과 계통을 공부하다 보니 문자 구조상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을 더 살펴보니 단순하지 않았다.
(1) 실록에는 ‘어머니 성’을 따른 사례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부 왕씨 후손이 외가 성을 따랐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단순 위장이 아니라, 정치적 긴장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① 실제 사례에서 보이는 변화
- 왕씨 후손이 노씨, 윤씨 등 외가 성으로 바꾼 사례가 등장한다.
- 이는 공식 기록에 남아 있다.
- 일정 시기 후 다시 본래 성으로 복원된 경우도 있다.
② 일시적 긴장 이후 완화된 분위기
- 조선 개국 초 일부 왕씨가 처형된 사건은 있다.
- 그러나 모든 왕씨를 색출해 제거했다는 체계적 증거는 없다.
- 오히려 후대에 관직에 진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사료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름을 바꿨다기보다 ‘관계 속에서 조정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3. 혼인 관계를 보면 ‘완전 단절’은 아니다
왕조가 교체되면 전 왕실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조선 초 기록을 보면 전 왕실과의 혼인 관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성계 가문과 왕씨 집안 사이에 혼인 사례가 있었고, 일부 왕씨 여성은 조선 왕자와 혼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1) 정치적 경쟁과 가족 관계가 공존했다
적대와 혼인이 동시에 존재한 시기
① 개국 직후의 권력 다툼
- 왕자들의 난 등 내부 권력 투쟁이 있었다.
- 이 과정에서 전 왕실 관련 인물 일부가 희생되었다.
② 동시에 이어진 인척 관계
- 일부 왕씨 집안과 혼인 관계가 이어졌다.
- 후대까지 관직에 오른 후손이 확인된다.
완전한 혁명이라면 이런 인척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4. 왜 ‘몰살’ 이미지가 반복될까
그렇다면 왜 왕씨 몰살설은 계속 반복될까.
내가 여러 사료와 연구를 읽으며 느낀 것은, ‘혁명 서사’가 필요했던 시대적 배경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 역사를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 개국을 강한 혁명으로 묘사하려는 흐름이 생겼다.
그 결과, 전 왕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서사가 더 극적으로 소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 극적인 서사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혁명으로 보려는 시선과 기록의 간극
① 혁명 서사의 장점
- 권력 교체의 강렬함을 설명하기 쉽다.
- 대중적으로 이해하기 간단하다.
② 그러나 기록은 더 복잡하다
- 일부 처형은 있었지만 전면적 말살은 아니다.
- 과거 급제자와 후손 기록이 남아 있다.
-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구 통계가 존재한다.
나는 역사 해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왕조 교체 같은 복합 사건은 더 그렇다.
마치며
왕씨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일부 희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관직 기록과 혼인 사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구 통계를 보면 ‘몰살’이라는 표현은 과장에 가깝다.
역사를 바라볼 때는 극적인 장면보다 남아 있는 기록을 먼저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나 역시 여러 번 생각을 바꿔왔다. 만약 주변에서 아직도 “왕씨는 다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정적으로 반박하기보다 기록 몇 가지만 차분히 소개해보는 것이 좋겠다.
그 한 문장만 바로잡아도, 조선 개국을 보는 시선은 훨씬 입체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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