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남편은 누구였나, 을제와 김인평까지 이어지는 세 갈래 설
시작하며
선덕여왕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당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는 일화다. 이 이야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평생 홀로 지낸 인물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런데 기록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남편이 있었다는 문장이 분명히 남아 있다.
정말 남편이 있었나? 있었다면 누구였나?
오늘은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과 정치적 정황을 하나씩 짚어보며, 가능성 있는 인물들을 비교해본다.
1.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남편’이 등장한다
내가 처음 고개를 갸웃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선덕여왕의 남편을 ‘갈문왕’이라 적어 둔 기록이 있다.
(1) 갈문왕이라는 호칭, 무엇을 의미하나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을 ‘음갈문왕’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갈문왕이라는 지위.
둘째, 이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음’이라는 글자다.
갈문왕은 신라에서 왕의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지던 칭호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다만 정확한 성격은 이미 고려시대 학자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서도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왕실 친족 가운데 이름에 ‘음’ 혹은 비슷한 글자가 들어가는 인물이 있었을까?
(2) 백반·국반,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출발한 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백반과 국반이다. 두 사람은 진평왕의 동생으로, 즉 선덕여왕에게는 숙부뻘이다.
이 설이 나오는 이유는 단순하다.
- 두 사람 모두 갈문왕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 ‘반’ 자가 필사 과정에서 ‘음’으로 오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왕실 핵심 혈통이라는 점에서 혼인 상대 조건은 충분하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하다. 이름이 비슷하고, 실제 갈문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걸리는 지점이 있다.
이들의 갈문왕 칭호는 각각 다른 명칭으로 전한다. 단순히 ‘음갈문왕’이라고 불린 기록은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나이다.
(3) 선덕여왕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나는 통치 기간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봤다.
- 진평왕은 50년 넘게 왕위에 있었다.
- 선덕여왕은 장녀로 기록된다.
- 즉위 당시 이미 중년을 넘겼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즉위 시점에 이미 상당한 연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숙부뻘인 백반·국반과 즉위 이후 새로 혼인했다는 가정은 다소 어색하다. 차라리 공주 시절에 혼인했고, 즉위 전후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자연스럽다.
결국 이 설은 “가능은 있으나 결정적 증거는 없다”는 단계에 머문다.
2. 즉위 직후 실권을 쥔 을제, 남편이었을 가능성
내가 더 주목한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을제다.
(1) 왕이 되자마자 정사를 맡긴 인물
632년 선덕여왕이 즉위하자마자 등장하는 기록이 있다. 을제로 하여금 나라 정사를 총괄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건 결코 가벼운 문장이 아니다.
왕이 즉위하자마자 전권을 맡겼다는 건, 단순한 신임 이상의 관계였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설이 나온다.
을제가 남편 아니었을까?
(2) 3~4년 뒤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 무엇을 의미하나
635년 말, 수품과 용춘이 전국을 돌며 민심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636년, 수품이 상대등이 된다.
을제는 이후 기록에서 사실상 사라진다.
정치사에서 이런 흐름은 낯설지 않다.
전국 순회 → 세력 정비 → 최고 관직 교체.
가능성은 몇 가지다.
- 을제가 사망했을 수 있다.
- 권력 다툼에서 밀렸을 수 있다.
- 왕과의 관계가 변했을 수 있다.
만약 남편이었다면, 그는 정치적 동반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결정적 약점이 있다.
그를 남편이라고 직접 적은 기록은 없다.
3. 경주 지역 전승 속 김인평, 또 다른 이름
세 번째 후보는 김인평이다.
(1) 조선시대 문헌에 남은 기록
경주 지리지 성격의 《동경잡기》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을 김인평이라 적고 있다. 단순히 이름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갈문왕이라고까지 서술한다.
이 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지방 전승이라고 해서 모두 허구로 치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연호 ‘인평’과 이름 혼동 가능성
634년,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으로 바꾼다.
이 시점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 을제가 물러나고 김인평이 새 남편이 되었다는 설
- 실제 남편은 다른 인물이었는데, 연호와 이름이 뒤섞였다는 설
- 아예 남편 교체 없이 연호만 바뀌었는데 후대에 혼동이 생겼다는 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건, 경주 지역에서 김인평이라는 이름이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4. 그래서 가장 가능성 높은 인물은 누구인가
이제 정리해보자.
- 백반·국반: 이름 유사성과 갈문왕 칭호라는 근거, 하지만 나이와 직함 문제 존재
- 을제: 즉위 직후 전권 장악, 정치적 동반자 가능성, 직접 기록은 없음
- 김인평: 지방 문헌 전승 존재, 연호와의 연결 가능성,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음
내 판단은 이렇다.
정치적 맥락만 보면 을제가 가장 현실적인 후보로 보인다. 즉위 직후 전권 위임이라는 장면은 단순 신하 관계로만 보긴 어렵다.
다만 문헌 전승까지 고려하면 김인평 설도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다.
백반·국반 설은 필사 오독 가설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한 단계 뒤로 물러난다.
마치며
선덕여왕은 단순한 전설 속 인물이 아니다. 15년 동안 신라를 통치한 정치가였다.
그녀의 남편 문제는 연애사가 아니라, 권력을 누구와 나누었는가라는 질문이다.
확정적 답은 없다. 하지만 기록을 비교하고, 나이를 계산하고, 정치 흐름을 읽어보면 각 설의 무게는 달라진다.
다음에 선덕여왕을 떠올릴 때는 모란 이야기뿐 아니라, 즉위 직후 정사를 맡은 인물의 이름도 함께 떠올려보길 바란다.
그 질문 하나가 신라 정치 구조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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